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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는 태평양전쟁/ 필리핀 공략

개전할 무렵 미국의 태평양지역 방위계획에는 일본과 전쟁이 벌어지면 일단 포기할 수도 있는 부차적인 곳이었던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근거지이며 1947년 독립이 계획되어있었다.

필리핀 주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의 방어를 맡고 있었고 개전이 임박해질 무렵에는 워싱턴으로부터 일본의 움직임에 대한 경고도 받고 있었다.
맥아더와 필리핀의 케손 대통령

하지만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당일 대만에서 출격한 일본 육ㆍ해군 항공대의 공격으로 채 손 쓸 사이도 없이 태반의 항공력을 상실 한데다

12월 8일 아침, 대만의 기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일본 육ㆍ해군 항공대는 안개가 걷히자 출격을 시작 필리핀의 미군 비행장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 항공대의 공격을 받고 있는 클라크 미군 비행장 
바탄 공격 중인 지상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격한 일본 육군의 97식 경폭격기 편대
12월 10일 루손 섬 남부와 북부 지역에 상륙한 혼마 마사하루 장군 지휘하의 일본 육군 제14군은 미ㆍ필리핀 혼성군에 심대한 피해를 입히고 22일에는 주력부대가 링가엔 만에 상륙 마닐라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이에 대한 미ㆍ필리핀 혼성군은 미군 정규군이 겨우 6천 명에 필리핀군이 11만 명이었지만 그 중 루손 섬의 방위병력은 6만 명에 불과했다.
링가엔 만에 상륙하는 일본 육군 제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 필리핀 전투 후 졸전으로 인한 문책으로 참모와 함께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던 그는 '바탄 반도 죽음의 행진'으로 알려진 연합군 포로학대 책임자로 전후 마닐라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의 침공에 맥아더는 아예 마닐라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빈약한 미ㆍ필리핀 혼성군을 울창한 정글과 험준한 산악지대이며 마닐라를 마주보고있는 바탄 반도로 집결시켜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면서 그의 사령부를 마닐라 만 입구에 있는 요새인 코레히도르 섬에 설치했다.
일본군의 폭격으로 연기에 휩싸인 마닐라 항
해가 바뀐 1942년 1월 2일 미군이 바탄과 코레히도르 섬으로 빠져나간 텅 빈 마닐라에 무혈 입성한 일본군 사령관 혼마는 1월 10일 바탄 반도에 공격을 개시하지만 미군의 맹렬한 포격과 저항에 막대한 피해를 입는 등 2주간이나 치고 받는 전투에도 성과는 커녕 미ㆍ필리핀군의 완강한 저항에 피해만 커졌다.
일본의 대본영은 필리핀 공략이 곧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 하에 홈마의 주력인 제48사단을 자바 침공에 돌렸고 그 결과 50일 정도 예상했던 필리핀 전투는 2월 중순이 지나도 여전히 바탄 반도를 점령하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후퇴하여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전투로 인한 피해도 막심했지만 말라리아, 이질 등의 열대질병으로 인한 병력의 손실도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다.
초조해진 혼마는 마닐라를 비롯해 주변의 점령지에 수용되어있던 3만 여명의 필리핀인과 연합국 피난민들을 바탄 반도로 추방해버렸다. 미ㆍ필리핀군의 식량사정을 악화시켜 전의를 꺾고 항복을 앞당기겠다는 의도였다.

코레히도르 섬 요새에서의 맥아더 장군과 그의 참모 서덜랜드 참모장. 호주로 탈출한 맥아더는 서남태평양지역 연합군총사령관으로 취임한다.

3월 10일, 루즈벨트 대통령의 전속명령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2주간이나 꼼짝도 않고 버티던 맥아더는 결국 지휘권을 웨인 라이트 장군에게 넘기고 호주로 탈출했다.

맥아더가 떠난 후 바탄과 코레히도르의 미ㆍ필리핀군은 외부로부터 구원의 손길도 차단된 채 일본군의 공격에 용맹하게 저항하며 극심한 식량난, 열대성 질병들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희망없는 기나긴 사투를 벌이고 있었으나 4월 9일 일본군의 총공격에 바탄 수비대가 항복을 하고 5월 6일에는 코레히도르 섬 요새의 웨인 라이트 장군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일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필리핀의 전미군에게 항복명령 방송을 하는 웨인라이트 장군
미군의 항복회견장. 왼쪽에서 두 번째가 웨인라이트 장군, 오른쪽에서 세 번째는 혼마 장군.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 미ㆍ필리핀군 포로와 민간인 등 질병과 굶주림에 찌든 12만 5천 명이 섭씨 35도의 염천 아래 64킬로에 이르는 죽음의 행군을 했다. 길가에는 굶어 죽고, 질병으로 죽고, 맞아 죽은 시체로 가득 쌓였다. 일본군이 예상한 포로는 4만 5천명 정도였다.
많은 필리핀군들은 군복을 벗고 귀향하거나 정글로 들어가 일본군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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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보우 | 2009/06/16 23:35 | 전쟁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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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06/17 11:0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레인보우 at 2009/06/17 21:01
그렇잖아도 한 번 볼 수 있다면 싶었는데 복사본이라도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Commented by 프르미에 at 2009/06/19 09:40
잘 알겠습니다.
만들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Commented by 레인보우 at 2009/06/20 22:49
거의 20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마음까지 다 설레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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